느슨한 정교함

  • Date2024.04.01

정교함의 굴레

건축은 어떻게 시작하여 마무리되는 것일까. 설계의 시작은 대개의 경우 커다란 윤곽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지역의 맥락에 대한 해석과 건물의 형상과 땅에 앉히는 방식에서부터 점차 작은 스케일로 옮겨간다. 물론, 사소한 디테일로부터 작업의 실마리를 찾는 경우도 있으나, 흔하게 경험하기는 어려운 방식이다. 두꺼운 색연필의 모호한 선에서 시작하여, 일대일의 스케일로 줌-인할 수 있는 캐드 프로그램 속 디지털화된 선까지, 건축이란 결국 스케일의 변화를 능숙하게 감지하는 일이다.

도면으로 정리된 언어가 물리적으로 구체화되는 과정도 유사하다. 대지 위에 규준 틀을 띄워 뼈대가 들어설 위치를 결정하는 것으로부터, 골조를 세우고, 부위별로 공종을 진행하여, 종국에는 건물의 구성 요소들이 몇 밀리미터의 단위로 만나는 디테일을 정리하며 건물은 완결된다. 

건축이 본질적으로 스케일의 변화를 다스리는 일이라는 점이 일을 고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건축가의 진정한 능력은 도시를 조감하며 지역의 변화를 가늠하는 매크로(macro)한 시점과 재료와 재료가 만나는 15mm의 조인트를 들여다보는 마이크로(micro)한 지점을 동시에 사고하고, 서로 다른 차원 간의 영향 관계를 예측하는 데 있다. 만나지 않을 것 같은 두 세계 사이에 좁은 다리를 놓고 종횡무진 횡단해야 하는 자가 건축가다.

정교함은 건축가의 유니콘이다. 상세하게 재료와 구조체의 만남을 묘사할 수 있는 도면의 세계와는 달리, 구축의 현장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건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도면의 세계와 시공 현장이라는 거대한 차원의 이동이 자리한다. 창조 의지의 주체로서 건축가와 제작자로서 시공자가 분리되어 있는 구조는 건축 과정을 통제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무수히 많은 관계자들(시공, 금융, 클라이언트, 허가권자, 컨설턴트 등)에 의해 작업의 순수성은 쉽게 훼손될 수 있는 취약한 대상이다. 건축과 도시 환경은 건축가의 손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사의 손을 빌려 만들어지고 사용자에 의해 변모되어간다. 이때 작가로서 건축가는 (안타깝지만) 구상과 제작이 분리된 절름발이로서의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기술과 자본이 응집된 시대의 최전선, 곧 하이엔드 건축에서만 발현되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동력 삼아 작업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긴 생애주기를 가진 건물에 대한 건축가의 느슨한 통제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느슨한 구축

건축의 외부 의존성을 인정하고 감내해야 한다면,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창조주-되기의 신화적 갈망에서 벗어나, ‘한 치의 오차있는’ 건축을 지향하는 것은 유연함을 포용하기 위함이다. 건축의 프로세스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예측불가함’은 즐거운 마음으로 창작의 재료로 동원하기 위한 선택이다.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 속에 공간을 짜맞추기 보다는 느슨하게 허용오차를 상정하는 구축이 필요하다. 이 느슨한 구축은 도시의 복잡다단한 시스템 속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변화에 대한 열린 태도를 의미한다. 우리의 손을 떠난 공간이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의연하게 버텨내고,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공간의 용법과 삶의 시스템을 완벽하게 설계하여 조화롭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의 건축은 느슨함을 통해 가능성을 수용하는 자세를 견지하려고 한다.

구보의 포트폴리오는 다양한 용도변경을 수반한 대수선 혹은 리모델링 설계가 의미있는 비중을 차지한다. 주택을 오피스나 주민시설, 공방작업실로 바꾸거나, 상가건물을 종교시설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신축의 경우에도 전형적인 용법을 벗어나서, 집과 일터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설정하였다. (집 안으로 침투하는 일터, 일터에 조성되는 집과 같은 분위기, 집에 맞닿아 있는 일터) 특정한 용도를 상정하고 꼭 들어맞는 맞춤형 공간을 설계하는 것과 달리, 애초에 다른 쓰임새를 가진 건물을 새로운 용법에 맞게 변형하는 것은 어렵고 성가시며, 빛이 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용도와 시간의 갭이 만들어주는 예측불가한 (impromptu) 즐거움이 있고, 작업의 전제가 되는 완고한 조건으로 인해 ‘창조주-되기’가 아닌 ‘조정자-되기’로서 건축가의 역할을 맡아왔다.

최선이 아닐 수도 있는

건축대학에서 스튜디오 교육을 받을 때, 그리고 실무의 현장에서도 한참동안 우리는 주어진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법을 찾는 것이 설계라고 생각했고, 그 답안은 어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건축사시험 2교시 평면설계에서는 주어진 조건에 부합하는 설계안을 그려내야 하고, 현상설계에서는 심사위원들의 관점에 합당한 최선의 제안을 당선시킨다. 그렇게 건축주는, 사회는 건축가에게 묻는다. ‘이게 최선의 답입니까?’ 그렇게 질문받고 훈련받은 건축가는 최선의 답을 찾고(설계), 그것을 현장에서 최대한 구현하기 위해(감리 혹은 설계의도구현) 가히 전투라 부를만한 의식을 치른다.

건축설계의 경험이 쌓이면서 서서히 분명해지고 있는 것은, 건축가는 작가적 의도가 치밀하게 구현되는 무결점의 작품을 만드는 사람 너머에 자리한다는 점이다. 정교함의 굴레를 벗어나더라도, 느슨함이 나태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건축가는 프로젝트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추진하고 조향하는 사람이며, 그 과정에는 긴장의 끈을 놓을 틈 없이 꾸준한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건물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마주하는 수많은 위기 속에서, 건축가는 그 과정을 묵묵하고 정교하게 엮어나간다. 꿈쩍할 것 같지 않던 프로젝트는 건축가를 통해 추진력을 유지하며 점차 실체를 드러내고 어느 순간 (심지어 인지하지 못했을 때) 우리 앞에 당도한다. 상상속의 창작물이 적확하게 재현되는 것, 준공의 순간에 응결된 작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건축가의 역할을 비루하게 만드는 피상적인 오해다. 작품의 결과는 그것이 쓰던 달던, 움직이는 프로젝트의 한 과정 안에 녹아있다. 프로젝트의 불가시성을 받아들이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섬세한 조율의 과정 안에 사는 것, 느슨한 정교함을 실천하는 것이 건축가의 존재를 유의미하게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