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가 만들어가는 도시

  • Date2023.07.03

근대적 건축설계교육의 탄생

도시는 ‘어반 패브릭(urban fabric)’ 이라고 불리는 고유의 패턴을 사람의 지문 처럼 지니고 있다. 이 패턴은 그 사회가 어떤 경제, 문화, 정치적 체계 아래서 도시를 만들어 나갔는지 읽을 수 있는 일종의 메타데이터 역할을 한다. 절대왕정이나 독재자의 도시는 축을 중요시하고, 권력을 대중에게 과시하려는 기념비적 공간을 축의 결절점에 둔다. 도시 공간에는 위계 관계가 분명하게 새겨져서, 도시의 부분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중요성을 다르게 부여받는다. 이 권력을 체화하는 대중들은 자연스럽게 권위에 종속되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반면, 민주적인 정신으로 형성된 도시는 미로와 같은 형상을 지닌다. 부분들간의 위계관계가 모호해지고, 각각이 동일하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철학이 고스란히 도시의 패턴 안에 담기는 것이다. 정치적 사상 뿐 아니라, 경제의 시스템도 도시의 구조에 영향을 준다. 자본주의적 정신에서 출발한 미국의 대도시들은 규칙적인 크기의 블록 그리드로 도시를 재단하고, 각각의 블록을 경제적 활동의 기반으로 삼는다. 그리드를 구성하는 개별 필지 혹은 블록들은 민간이 이윤추구를 위해 자율적으로 개발하는 다원주의적 성향을 띈다. 그 결과물은 뉴욕의 맨하탄과 같이 경제적 효율을 극대화하는 개발의 양상이 도시 전반에 전개되면서 완성된 전체를 이룬다.

우리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을까? 최근에는 웹상에서 손쉽게 과거의 항공사진을 연도별로 열람할 수 있다. 우리 도시의 근대는 정교하게 조절된 도시계획이 부재한 상태에서 급격한 도시의 팽창과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자연발생적으로 필지가 구획되어왔다. 그 결과로 유기적인 형상의 도시 패턴을 남겼고, 요즈음에 와서는 원도심이라고 불리는 곳에 아직 그 흔적이 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산업화가 주도했던 근대 이후 현대 사회의 도시로 점차 진화되면서 도시 패턴에 있어서도 분명한 변화가 눈에 띈다. 유기적으로 펼쳐진 작은 단위의 도시 블록들이 빽빽하게 채워나갔던 도시가 하나 둘 저밀도의 거대한 필지로 변경되어가고 있다. 바로 아파트 단지들의 등장이다. 우리 사회의 다수가 욕망하는 주거 형식은 이 아파트들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규모의 세대 수를 가진 단지형 아파트’들이다. 이 단지형 아파트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편리하고 쾌적한 기반시설들과 규모의 경제에서 비롯되는 관리서비스의 질에 있다. 세대수에 비례하여 갖춰진 지하주차장, 청결한 쓰레기집하시설, 보육시설, 피트니스센터, 북카페, 키즈카페, 조식서비스등의 커뮤니티 시설.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서비스 시설들이 패키지로 제공되는 것이 단지형 아파트의 매력이다. 낙후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재개발하거나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공급되는 단지들은 본래 공공이 재원을 투여하여 시민들에게 제공해야할 다양한 도시 기반시설들을 각자도생으로 해결하는 사업방식이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상황에서 유효한 주택 공급 방식으로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경제적인 성장을 성취하고, 자원의 배분과 복지가 중요해지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 단지가 만들어가는 도시는 몇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도시는 작은 단위의 필지들이 세포조직처럼 도시 전체를 채우고, 각각의 세포가 제각기 필요에 의해 생성되고, 변형되고, 사라지는 신진대사를 일으키며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단지는 도시의 세포조직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뭉뜽그려버리고, 이것을 수천명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보유하는 개념이다. 작은 단위의 필지가 모여 커다란 단위로 병합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용이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소유하는 하나의 필지를 다시 다양한 세포조직으로 변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비가역적 특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가 단지화 된다는 것은 세포조직의 생명력이 사그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단지에 의해 메가스케일의 필지로 도시가 변환되어가는 것은 도시 기반시설의 사유화, 독점화라는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시민들 다수가 이용하던 도로나, 공원, 공지등이 도시정비를 통해 단지화되면,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공공시설을 기부채납하는 것을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 구석구석 모세혈관처럼 뻗어나가 있던 공유의 장소들과 하나의 건물 형식으로 경험되는 공공건축은 그 경험의 질과 도시의 활력이라는 관점에서 비할바가 아니다.

도시는 생명체와 같다는 비유를 흔하게 사용한다. 이 비유는 도시가 다양성, 역동성, 유연성을 작은 필지의 집합으로 성취하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도시가 단지화를 통해 거대한 단위로 전환된다는 것은 이와 반대의 노선을 걷는 것이다. 비록, 대중 다수가 선호하는 주거 형식으로서 단지형 아파트가 많은 효용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도시의 생명력, 지속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