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교육과 인문학

  • Date2022.02.03

근대적 건축설계교육의 탄생

고전시대의 건축은 환경과 문화를 구성해나가는 인류적 노력이 가장 극적인 존재감으로 표출되는 양식이었다. 그렇기에, 건축은 인문학의 결실이 집적된 최종 생산물과 동일한 지위를 오랜 시간동안 차지할 수 있었다. 한편, 교육기관을 통한 근대적인 건축설계교육이 출발된 것은 19세기 프랑스 왕립아카데미를 기반으로 하는 에꼴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자르의 교육체제에서 건축설계교육은 서양 고전 건축의 형식 체계를 기반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바로크의 모범적인 선례들을 탐구하여 근대적 기능을 담아내는 건물의 설계를 목표로 했다. 근대적 건축설계교육의 출발은 역사와 고전 문화를 학습하고 모사하는 지점, 인문학 교육에 있었다 . 하지만, 기술의 혁신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학문이 전문화, 세분화되면서, 건축에 있어서 공학적 지식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로 인해 건축설계교육 역시 기능인, 직능인으로서 건축가를 훈련시키는 것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즉, 실무교육과 이론교육이라는 두 줄기로 건축설계교육을 재단하고, 교육과정의 표준적 절차를 상정하여,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교육을 인증하고 자격을 공인하는 것은 근대적 체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건축설계교육에서 인문학의 역할을 근심해야 하는 현재의 형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90년대 교육의 지형

잠시 1990년대 대학캠퍼스의 건축학과로 돌아가 본다. 당시 대학의 건축설계교육은 건축가의 사회적 책무에 무게의 중심을 두고 있었다. 비록, 민주화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방향키를 조절하던 상아탑의 분위기는 점차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건축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건축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사고에 깊이 탐닉하고 있었다. 심지어, 도시 구석 동네의 작은 근생 건물을 설계할 때도 어떻게 도시의 공공성을 담보하고, 민주적인 도시 공간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두고 뚜렷한 해결책 없는 토론을 끊임없이 이어가곤 했다. 설계스튜디오 수업의 교수법도 그 연장선 상에서 문화인류학적 색채를 띄고 있었다. 모든 프로젝트의 시작은 지역의 역사와 환경, 풍습, 문화와 관련된 자료의 철저한 수집에서 출발했다.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고지도의 선들에 대단한 의미가 감춰있다는 듯이 트레이싱하고 살펴보곤 했으며, 대지를 배회하며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다. 대문의 크기, 전신주의 위치, 보도블럭의 패턴 등등.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기록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렇게 자료들에 몰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렇다할 설계 방법론의 습득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구축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그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당시에 꽤나 유명한 일본건축가가 우리 설계스튜디오를 방문했었던 일이 있었다. 설계 발표와 작업 과정을 며칠간 지켜보던 그 건축가는 한국의 건축교육 환경이 부럽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일본의 건축과 학생들은 건물 만들기로서 건축에 치중해서 디테일한 계획에는 강하지만,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호기로운 마니페스토를 던지는 젊은 에너지를 보기 힘든데, 한국의 학생들은 이와 다르게, 비록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건축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이야기를 줄곧 주장하는 것이 흥미롭다는 것이었다. 그 건축가는 우리 건축설계교육 환경의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건축학 교육 인증 체제의 10년

90년대 건축학과 학생들은 실무건축가로서의 성장을 이끄는 교육법, 구축술로서의 건축설계, 첨단 도구를 사용한 새로운 설계방법론을 스튜디오를 통해 학습하고 수련하는데에 목마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2002년에 건축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건축학 전문학위 과정이 국내에 도입된 데에는 이러한 문제의식도 부분적인 역할을 했다고 이해하고 있다. 건축학 교육 인증 체제는 건축설계교육의 변혁을 이끈 중대한 사건이었다. 비단 교육기간이 1년 더 늘었다는 것 뿐 아니라,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으로 인증을 받고, 실무건축가의 양성을 주된 목표로 삼는 새로운 체제의 출발이었다.       2006년 처음으로 대학별 교육프로그램 인증이 이루어진 이후, 각 학교의 커리큘럼에는 큰 변화가 뒤따랐다. 시수의 대폭적인 증가로 교육과정 전체의 뼈대를 담당하게 된 설계스튜디오 수업이 그 핵심에 있으며, 전공필수 과목의 증가로 5년 과정 동안 심화된 건축학 전공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듯 인증체제 하의 건축학 교육은 실무건축가 양성이 최우선시 되고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면서 건축학 교육 인증프로그램의 문제점들을 점검하고 이에 대한 대응방안 모색이 건축학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현재 부각되고 있는 문제점은 우선, 대학별 여건과 환경, 학생들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인증기준 적용으로 인한, 대학별로 특화된 교과구성의 부재를 들 수 있다. 또한, 인증교육이 실무 건축가 양성이라는 일종의 직업교육과 같은 성격을 띄게 되면서, 실무로서의 건축학 교육과 학문으로서의 건축학 교육에 있어서 적지 않은 간극이 나타나고 있다. 전공 교육의 이수학점 비율이 크게 늘어나면서, 학생 개인별 차이를 존중하는 유연한 커리큘럼을 구성하기 어려워지고, 결과적으로, 타 전공 수업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는 인문학 교육이 미비해지는 부작용이 감지되기도 한다. 건축학 전공 수업 내부에서는 역사, 이론과 관련된 수업들이 설계스튜디오에 부차적인 과목으로 자리매김하며, 자율적 학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낳고 있는 것도 또 다른 현상이다. 즉, 전문인으로서 건축가를 배출하는데에는 성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직업인으로서 건축학자의 양성에는 의문이 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의 현장에서 이렇게 인문학 교육의 비중이 약화되면서 발생한다고 의심되는 몇 가지 현상들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설계스튜디오의 학생들에게서 문학적 상상력의 빈곤을 느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주어진 프로그램을 해석하거나 새로운 장소의 쓰임새를 제안할 때, 몇 가지 모범 답안과 같은 해결책들이 반복될 때 느끼곤 한다. 학생들의 디지털 도구 사용능력과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능력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풍부해졌지만, 자기가 설계하는 건물과 도시 안에서 기대되는 행위와 사건들에 대해서는 진부한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직 사회적 경험이 부족한 학생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는 신선한 제안마저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설계스튜디오를 통해서 실무로서의 건축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글쓰기로서의 건축, 현상을 해석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틀을 만들어주는 건축의 역사, 이론 관련 교육이 주목을 덜 받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건축 역사, 이론 수업들이 인증교육의 핵심인 설계스튜디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진행되어야 하는지 그 해법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림 MIT 인문예술사회과학대학의 강의요소 구성

인문학 교육의 시스템

현재의 인증 교육 시스템에서 인문학 교육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대체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타 전공에서 개설한 교양교과목의 수강이며, 다른 하나는 건축학 전공 내부의 역사, 이론 관련 수업들을 통해서다. 이는 대부분의 국내외 대학에서 공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방법이다. 여기에서는 이와 관련해서 미국에서 최초로 건축역사를 미술대학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역사이론비평 프로그램을 건축학과 내부에 설치하여 건축학 교육의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MIT의 경우를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MIT의 인문예술사회과학대학School of Humanities, Arts, and Social Sciences(SHASS)은 일종의 지식 플랫폼으로서 다양한 전공 분야의 학생들이 기술, 과학적 창조력을 촉발할 수 있도록 사회에 대한 문화적 이해를 교육하고 역사적 관점을 정립시켜, 비판적 사고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MIT가 설립된 1861년부터 공학전공과정의 교양교육을 담당해왔으며, 건축학 전공 학생들도 SHASS의 수업을 필수적으로 듣도록 되어있다. SHASS는 경제학, 정치, 인류학, 역사, 언어, 철학, 문학, 음악, 연극, 비교미디어연구 등의 세부분야로 수업들이 개설되어 있다. 1973년 대대적인 커리큘럼 개혁을 통해서 모든 전공학생들은 SHASS의 졸업요건을 만족해야만 학위를 수여받을 수 있게되었다. 그 세부적인 사항을 보면 Distribution Component에 해당하는 예술, 인문학, 사회학 카테고리에서 최소 하나 이상의 강의를 이수하고, Concentration Component에 해당하는 3과목을 특정 분야에 집중해서 이수해야한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HASS Elective 2과목과 Communication Requirement 수업 4과목을 수강해야만 학위수여 요건을 갖추게 된다. 특히, 보스턴의 여타 대학들인 Wellesley College, Harvard University와 교차 강의를 개설하여 다양한 인문학 분야의 강의를 학생들에게 제공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수업들은 단순히 해당 과목의 교과서적인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수강생 각자의 전공과 연계하여 학생들의 학제 간 교류를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생물학과 건축학이 통합된 연구를 디자인한다거나 컴퓨터과학과 건축학이 협업하는 등의 다양한 결과물을 이끌어내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스탠포드대학의 D-School도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D-School은 특정 전공의 학위 수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협업하여 교차 연구를 수행하며, 인문학에 기반하는 사고를 촉발하는 플랫폼으로 작동한다. 대학 내에서 이와 같은 인문학 플랫폼으로서의 교육시스템의 중요성은 점차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MIT의 건축학 전공 내부에 개설된 또 다른 중요한 인문학 교육 요소는 역사이론비평프로그램History, Theory, and Criticism Program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20세기 초반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의 커리큘럼에서 역사 과목을 추방시킨 모더니즘 건축 이래로 건축학 내부의 인문학 교육은 줄곧 위기를 맞았었다. 1964년 AIA-ACSA가 크랜브룩예술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개최한 Teacher Seminar on HTC of Architecture는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열렸던 건축학자 및 교육자들의 모임이었다. 이후 CASE, IAUS의 활동과 Opposition의 출판,MIT Press의 HTC 관련 서적 출판 러쉬로 이어지며, 역사이론비평 연구를 건축학 담론의 중심으로 부상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왔다. 그 결과물로 1976년 북미 최초의 건축학 역사이론비평 프로그램이 MIT에 개설되며 중요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는 역사와 이론이 건축학과에서 리써치 프로그램으로서 자율적 분야로 독립될 수 있음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MIT의 역사이론비평 프로그램은 칼포퍼의 과학철학에 영향을 받은 스탠포드 앤더슨 교수의 영향력 아래, 역사와 이론 연구의 과학적 방법론을 정립하며, 실무건축가 교육에 종속된 교양과목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 리서치 분야로 자립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적 역할은 스튜디오 시스템과 통합된 교육을 수행할 수 있는 건축학자를 양성하는 것과 동시에 스튜디오 교육 문화가 소구하는 비판적 사고 능력 향상에 있다. 이를 위해, 단순히 개괄적인 역사이론 수업들 뿐만 아니라. 자본, 정치, 자연재난, 대중매체와 같은 특정 세부 주제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고 비판적 시각을 키우는 수업들이 개설되어, 스튜디오 수업의 실무 교육과 연계하여 인문적 관점 정립에 기여하고 있다.

그림 MIT 건축학 교육 인증프로그램인 MArch의 교과목 이수다이어그램

맺음말

실무 건축가 교육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건축학 교육 인증 프로그램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축소되고 있는 역사이론 관련 수업들의 비중과 그로 인해 자칫 소홀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인문학 교육에 대해서는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은 간단하게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간략하게 고려해 볼 만한 방향을 제언해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우선, 관습적으로 개설된 소위 말하는 ‘역사교육 3단계 (서양-근현대-한국건축)’의 편향된 구성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학교별 스튜디오 교육 목표와 방향을 공유하는 체계 내에서 역사교육을 재정립해서 ‘디자인으로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또한, 획일적인 인증프로그램의 영향으로 단독주택, 미술관, 오피스와 같은 방식의 스튜디오 주제 선정을 탈피해서, 설계스튜디오가 현실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의 기회로 활용되는 방향을 유도할 수 있다. 기술과 사회의 변화는 근대적 건축유형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도시건축을 생산해내고 있다. 하지만, 설계스튜디오의 주제는 여전히 근대적 구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시에 실재하고 있는 문화적 현상들을 사고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식의 설계스튜디오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학생들로 하여금 우리가 거주하는 도시에서 제기되는 사회, 문화적 문제에 접근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건축설계교육에서 인문학 교육의 역할을 강화하는 그 기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