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 4
- Date2022.02.28
상상력의 공간
창의력과 상상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건축에서의 상상력이라고 하면, 매력적인 이미지, 화려한 외관, 혹은 미로와 같은 복잡한 공간, 놀이동산에서나 존재하는 동화속의 마을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일차원적인 건축형태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만들어내는 공간과 도시는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합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어린이잡지 발행인 김규항의 글 한 부분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놀이동산이니 놀이캠프니, 놀이도 상품화하다보니 적어도 눈과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 정도는 지어야 노는 아이들이구나 싶다. 그러나 빠르고 센 놀이가 있듯 느리고 부드러운 놀이도 있다. 혼자, 혹은 동무와 함께 가만히 앉아 별다른 목적도 내용도 없이 느리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인 것이다 며칠 전 충청도 어느 시골 고개를 넘다 눈에 들어온 풍경에 가슴이 저렸다. 외딴집 툇마루에 두 아이가 나란히 걸터앉아 땅에 채 닿지 않는 다리를 까닥거리며 먼 산을 보고 있었다. 먼 산 보는 아이를 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만일 아이가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한참 먼 산을 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 그 평화로운 풍경을 훼방할세라 조용히 미소 지으며 지나칠까? 사람이 복잡한 존재인 건 사람에겐 영혼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언어로 표현할 수도 수치로 계량할 수도 없는 참으로 참 모호한 것이지만, 영혼이 없으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영혼의 상태로 좌우된다는 걸 우리는 안다. 아무리 초라한 처지라 해도 영혼이 충만한 사람은 아랑곳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추어도 영혼이 결핍된 사람은 외롭고 허무해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 <먼 산> 김규항 http://gyuhang.net/1826 |
아이들이 자라는 시간 (비어있는 시간)이 필요하듯, 사람에게는 자라는 공간 (비어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비어있는 공간이 가지는 힘을 경험해보면, 비어있음이야말로 영혼을 위한 공간이라는 말을 절감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건축가들은 치밀하게 구성된 공간을 의도적으로 비움으로써 공간의 힘을 획득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루이스 칸의 쏘크 연구소의 비어있는 광장은 아주 좋은 예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인 종묘 정전의 앞마당이나 최근 서울에 만들어진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땅속 깊은 중정마당을 방문해보면 사람들에게 사색의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런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 Liao Yusheng(좌) ⓒ 문화재청(중) ⓒ 남궁선(우)
이처럼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환기시키는 종교적이고 사색적인 공간과는 다르게, 일상적인 건축에서의 비워냄은 오히려 거주자들에게 편안함을 선사합니다. 목적이 불명확한 공간이 다양한 켜를 가지고 풍부하게 있을수록, 가능하면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할수록 그렇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가장 가까운 예로는 전통적인 한옥집의 마당이 있는 구성이 그렇습니다. 전통한옥은 생활의 편리성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불편한 집이었지만, 공간의 풍요로움의 관점에서보면 매우 훌륭한 형식입니다. 현대사회에 맞추어 생활형태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주거의 형식의 변해가야 하는데, 우리는 전통적인 주거의 방식를 극단적으로 지워버리고 경험한 적 없는 아파트라는 주거형태에 전 국민이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 – 층간소음, 주거의 계급화, 단지형개발 등 – 을 경험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문제로 여겼던 ‘주거공간의 균질화에 따른 상상력의 저하’ 현상은 생각보다 깊고, 장기적인 부작용을 우리 사회에 가져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파트에 오래 거주한 분들의 단독주택을 설계하다보면, 많이 듣는 질문 중에 하나가, “이 공간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입니다. 효율을 극대화하여 꽉 짜여진 공간에 익숙하다 보니, 우리는 (아직) 필요하지 않은 것을 낯설어 합니다. 모든 곳에 기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곳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를 정밀하게 예측하여 그를 위한 맞춤형 공간과 가구가 빈틈없이 들어서 있는 것이 좋은 설계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이런 방식의 설계가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만, 비워놓은 공간 하나없이 참기름 짜내듯 밀어넣은 공간이 이 시대 주거의 표준모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방문을 열면 거실이고 현관문을 열면 엘리베이터실이 나오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배치, 사용자의 경험보다 시공의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건축방식은 최소한의 경우에서만 적용되어야 합니다.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 획일화된 주거타입은 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또 다른 부작용도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다양성이야말로 구성원의 행복감을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남이 비슷할 것이라는 사고가 바탕이 되면, 본인에게 집중하기 보다는 타인과의 비교우위에서, 혹은 타인과의 동질감 획득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찾곤 합니다. 동질성을 담보로 하는 대규모 아파트 환경의 주거방식은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공간경험을 하게 하며, 우리 사회의 유연성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미래사회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와 같은 거대 단지가 도시의 물리적 변화에 대응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획일적인 경험을 강요받는 사회는 예측하지 못하는 변화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이나 체코와 같은 다른 나라에서는 주거단지를 개발할 때, 동일하지 않은 평면타입을 일정 세대수이상 확보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거나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대가 동일한 평면타입을 가지면 더 효율적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겠지만, 효율성 만큼이나 중요한 ‘다양성’이란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를 거주의 개념이 아닌 투자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사회에서는 균질한 평면이 가지는 편리한 환금성이 여러모로 매력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단독주택이나 빌라는 가지고 있는 조건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시세파악이 정확하지 않고, 비교가 어려우며, 쇼핑하듯 매매하기가 어렵습니다. 효율과 다양성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 사회는 그 균형을 찾는 것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건축가로 활동 하면서 어린이집을 다니는 어린 아이를 한 명 키우고 있습니다. 대단지 아파트에 전세로 살면서 길 건너 오래된 동네에 있는 2층집을 고쳐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무실이 있는 오래된 동네는 낡고 불편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재개발을 기다리며 길 건너 대단지 아파트가 있는 곳처럼 깨끗하고 안전하고 편리한 동네가 되고 싶어 합니다. 저는 딸아이를 안전한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만, 안전을 이유로 생명력있는 가능성들이 거세된 곳에서 키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을 사회는 함께 고민해야 하며 좋은 밸런스를 찾기 위해 머리를 모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고민들은 논의될 기회도 없이 자산, 편리, 교육이라는 어른중심의 이해관계가 모두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작은 필지들이 만들어내는 개별성과 독립성이 거세되고 천편일률의 도시환경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위험과 지저분함을 거세한 도시에는 안전과 효율이란 가치가 남았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가능성과 다양성입니다. 아이들에게 도시는 무서운 곳이지만, 예측불가능한 모험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두근거림이 없는 도시환경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이 생길 수 있을까요?
글을 마치면서 짧은 영상 하나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테츠카라고 하는 부부 건축가가 자신의 세 아이들을 위해 하나의 공간으로만 구성되어 있던 집을 개조하여 각자의 방(이라기 보다는 구획)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인터뷰에 나오듯이, “아이가 태어나 함께하는 가장 아름다운 10년의 시간이 지나고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아이들의 방을 만들었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에게 거주의 공간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고, 그의 영혼이 자라는 것에 관심을 두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산과 효율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입니다.

Yui and Takaharu Tezuka, Tokyo, Japan
https://www.nowness.com/series/in-residence/yui-takaharu-tezu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