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 2
- Date2021.11.16
단절보다 소통
저는 ‘문지방 건축’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영어로는 Threshold라고 하는데,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는 지점을 의미합니다. 건축설계를 할 때,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주제와 항목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이질적인 재료가 만나는 곳이나, 서로 다른 영역이 만나는 지점, 내외부가 교차되는 곳에 대한 고민이 충분할 수록 좋은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건축설계를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목적이 분명한 공간 -예를 들면, 주택의 방, 학교의 교실, 교회의 예배당 등- 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 건축설계의 경험의 더 많아질수록, 중요하게 다가오는 곳은 ‘비목적성의 공간’입니다. 집의 현관, 빌딩의 로비, 학교의 복도 등이 그렇습니다. 주요공간을 지원하기 위한 부수적인 공간이라 여겨지기 쉬운 곳들인데, 이런 공간의 특징은 서로 다른 영역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는데 있습니다. 이 연결공간이 얼마나 편리하고, 적절하게 열려있거나 닫혀있고, 여러겹의 풍부한 공간켜를 가지느냐에 따라 건축물을 이용하는 사람의 공간적 경험이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건물 내부의 영역들을 연결하는 방식뿐 아니라, 건물이 도시와 만나는 방식도 ‘문지방 건축’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건축물은 외딴 섬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지는 사물이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맺기를 통하여 자리를 잡는 존재입니다. 다른 것이라고 하면, 땅, 주변건물, 도로, 자연 등의 주변맥락Context을 뜻합니다. 사적으로 소유한 부지에 내 돈을 들여 집을 짓고, 개인의 편의를 위해 사용한다고 해도 건축물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공공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축이 가지는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어떻게 다루는가는 건축가에게 주어진 오래되고 중요한 숙제 중 하나입니다.
서계동에 있는 오래된 빌라를 서울시의 요청으로 주민들이 사용하는 주민회관으로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발주처의 요청은 건물 내부를 잘 고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저는 그에 더해서 빌라 건물 후면의 후미진 골목길을 향해 세 칸의 계단으로 만들어진 부출입구 신설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런 작은 변화로 인해, 담으로 닫혀있고, 도로와 만나지 못했던 빌라 건물이 앞골목과 뒷골목을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어둡고 무서웠던 골목길은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조명으로 자연스레 생기를 얻고, 건물과 도로의 높이차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색적인 계단은 그 자체로 건물에 개성을 부여하는 멋진 장치가 되었습니다. 건축이 주변환경과 가장 첨예하게 만나는 지점인 ‘문지방’을 어떻게 잘 만들었는지는 건축물의 존재가 도시를 더욱 풍요롭고 살만한 곳으로 만드느냐, 괴롭고 거친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하느냐를 가름짓는 요소가 됩니다.
전통 재래시장은 판매를 원활히 하기 위한 뚜렷한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곳입니다. 그 결과, 흥미롭게도 자연발달한 ‘문지방 건축’의 극단적인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판매자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구매자가 가게 내부로 들어오며, 더 많은 볼거리(상품)를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느슨하고, 가게 안과 길을 구분하는 켜가 불분명하며, 그 얇은 막을 통해 판매자와 구매자, 상품이 혼재되어 있는 광경자체가 만들어내는 다이내믹이 대단합니다. 또한 개별 가게의 규모가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인지가능한 정도여서 안정감을 주고, 나란히 늘어서있는 가게들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어 다양성을 확보합니다. 전통 재래시장이 종종 인기있는 관광장소가 되는 것은 이러한 풍경이 주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즐거운 활력을 살펴보면 건물과 도시가 소통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재래시장의 가로입면의 중요성을 적용한 사례로, 수유1동 주민센터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민센터는 다양한 시설군 중에서도, 월등히 높은 공공성을 가져야 하는 시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건물은 그늘진 곳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고, 도로와 주민센터사이에 활용도가 떨어지는 외부공간이 방치된 듯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어떤 이는 생각하겠지만, 이처럼 우리가 문제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도, 오늘도 우리의 도시환경이 무심하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밝은 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세 개의 박스를 삽입하여 – 애초에는 네 개의 박스였으나 예산의 문제로 세 개의 박스로 변경됨 – 주민센터의 존재감이 도로에서 확실하게 읽히도록 했습니다. 분절된 박스는 재래시장에서 배운 교훈을 되새겨 보행자의 스케일에 맞고, 각각의 박스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져 다양성을 표현하는 요소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주민센터가 도로쪽으로 가깝게 나옴에 따라 건물 내부인 민원 대기실에서도 커다란 창을 통해 밖의 세상을 가깝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건축가의 개입은 사소한 변화이지만, 사람들의 일상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는 점에서 큰 변화입니다.
마지막으로, 현대 한국 도시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단지형 개발은 도시적 규모의 단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최근 뉴스에서 접하게 된 소식 중에 특정 아파트의 주민회장이 단지 외부에 사는 어린이가 자신의 아파트단지 내의 놀이터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는 사건이 보도된 바 있습니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러한 사건들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도시를 사유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작은 조직들을 파괴하고 거대 단지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재개발에 익숙해 지다보니 공동의 자산이었던 도로와 외부공간을 담장으로 경계짓고 보니, 일면 내 것과 네 것이 구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대 아파트 단지를 만들기 위해 사라지는 많은 소로와 대로는 과거에는 출입문이 없이 드나들 수 있었던 도시 전체의 중요한 인프라였습니다. 우리는 인식하지 않아도, 도시에서 제공해주는 다양한 인프라의 덕을 보고 있습니다. 수도, 전기, 도시가스, 쓰레기, 오수, 택배, 우편배송 등의 사회기반 서비스를 받지 못하면,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혜택을 도시로부터 받고 있으면서, 그러한 인프라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동의 노력이라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만들기 위해 없애버린 도시의 모세혈관들과 다양한 외부공간에 대해 미안해해야 할 일입니다.단지형 재개발은 거대 단지 경계부를 구성하는 담장과 옹벽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는 도시의 자연스런 흐름을 끊어버리고, 건물과 도로의 소통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도시의 풍경을 단조롭고 지루하게 만든다는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개별 건물과의 소통이 없는 도로는 죽은 도로이며, 보행자가 아닌 자동차를 이용하는 도시로 점차 변해가는 이유가 됩니다.
사람의 신체도 혈액이 순환하면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배출하듯이, 도시의 생명력을 위해 원활하게 물류와 사람이 이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다수의 기억에 남아있는 골목길이 사라지고,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입주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단지들로 바뀌고, 대지의 경사를 고려하지 않고 거칠게 자리잡은 건물들로 빼곡한 도시환경 속에서는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기가 힘듭니다. 자동차가 아닌 보행자의 스케일과 속도에 적절한 도로변 환경이 밀도있게 펼쳐지는 도시를 만드는 데는 좋은 ‘문지방’을 가진 건축물과 단지계획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