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 3

  • Date2022.02.03

도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집니다. 신도시처럼 몇 년 만에 갑자기 만들어지는 곳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 도시는 천천히 만들어지고, 변화합니다. 도시에는 다양한 사람이 거주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변화의 시간이 느린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느린 속도는 그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변화에 적응할 시간을 허락합니다. 서울은 매우 활력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곳입니다. 상대적으로 변화의 속도가 빠른 편인데, 이는 장점도 지니지만, 동시에 거주자에게 정주의 감각을 빼앗아가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고 자랐던 동네의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때 느끼는 허탈감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종종 경험하곤 합니다.

대치동 가로 입면변화 실측조사 2008년(위), 2017년(아래) ⓒ 구보건축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는 건축도 동일한 속성을 가진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건축물을 짓는 기간이 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짧지만, 사람이 속하는 물리적 환경이 바뀐다는 의미는 동일하므로, 그 변화에 대해 잘 생각하고 시간을 들여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흔히, 건축설계를 창의적인 작업에 국한하거나 예술적인 조형물, 공간의 아름다움을 구현해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저도 학생의 입장으로 건축설계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여러 가지 경험이 쌓이고, 건축설계를 업으로 삼다 보니,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기 위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순간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전체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부분이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좋은 건축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를 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설계가 진행되는 대지를 여러 번 가보고,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고, 주변 건물과의 관계를 파악하며 그 땅에 대한 이해를 구합니다. 현황측량, 경계측량, 지반조사 등 대지에 관한 기술적인 정보를 얻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의뢰자가 원하는 용도와 건물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의견 교환도 중요합니다.이러한 발품과 시간이 드는 과정을 거쳐 주어진 조건들을 파악하고 나면 비로소 건축가의 창의력이라는 것을 발휘할 시간이 됩니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재미있는 상상이 나오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 때는, 건축적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비교적 밀도 있게 진행하는데, 다양한 도구 (tool)를 활용하게 됩니다. 생각의 큰 방향을 명확하게 하는 데는 핸드 드로잉 혹은 다이어그램이 좋습니다. 아이디어가 좋아도 건축은 현실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현실세계에서 구축가능한 것인지를 확인 하는데는 실제 치수를 반영한 도면이 좋은 도구가 됩니다.과거에는 2D로 만들어진 도면이 주요한 툴이었다면, 최근에 들어서는 점차적으로 3D 모델링을 많이 활용하여 공간감과 재질감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왜곡되지 않은 전체적인 볼륨, 조형성, 그리고 대지 및 주변과의 관계를 한눈에 파악하게 해주는 것은 축소된 사이즈의 모형입니다. 작업하는 사람에 따라 선호하는 툴의 종류가 다를 수 있지만, 저는 주로 이 네 가지 방식을 모두 혼용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툴만 사용하다 보면 걸러내지 못하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장점과 단점을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건축센터 라키비움 인테리어 설계
다이어그램(좌측위), 3D모델링(우측위), 모형스터디(좌측아래), 단면도(우측아래) ⓒ 구보건축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 고민을 통해 설계안이 만들어지고나면, 어떻게 표현하면, 이제 마라톤을 시작하는 출발선에 섰다는 봐도 좋습니다. 구조, 전기, 설비, 통신, 소방, 토목, 조경, 가구 등 여러 협력하는 분야와의 협의를 통해 여러 차례 변경이 이루어집니다. 현행 건축법에 맞는지, 무장애계획에는 문제가 없는지, 목표하는 에너지 등급을 받을 수 있는지, 소방규정에 부적합한 것은 없는지 검토가 필요합니다. 이런 복잡한 과정과 동시에, 설계안을 의뢰인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자료를 만듭니다. 예산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에, 예산을 고려한 적정한 재료, 공법, 시방을 선정합니다. 시공성을 생각해야 하는 건 당연한 얘기입니다. 건물의 규모나 중요도가 있는 경우에는 관련 심의 및 자문절차도 추가됩니다. 이런 복잡 다단한 과정을 거치다보면 애초에 건축가가 만들려고 했던 아이디어가 무엇이었는지 흐릿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 과정을 대응하고 조정하는 것에 지쳐, 어느 정도 포기하는 마음으로 설계안을 바꾸는 경우도 생깁니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것이 반영된 설계안이 만들어지고, 담당 시공사가 선정되면 설계라는 큰 단락이 마무리되고 시공단계가 시작됩니다. 현장에서는 설계 당시 인지하지 못했던 많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갑작스런 원자재값 상승으로 원하는 자재를 사용하지 못해 급하게 바꾸어야 할 수도 있고, 시공자의 실수로 도면과 다르게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설계도서가 충분한 시공성을 고려하지 못해 현장에서 별도의 디테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집을 지으면 10년을 늙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일은 많은 수고를 요하는 일입니다. 순간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어느 날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앞에 설명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능력만큼이나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밀고 당기기를 하는 꾸준함이 좋은 건축을 만들어내기 위한 건축가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내가 열심히 노력하여 만들어낸 설계안을 흔드는 외부 요인들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의견들이 간섭으로 느껴지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개입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도 합니다. 건물은 사유지에 지어지더라도, 개인의 돈으로 만들더라도, 근원적인 공공적인 속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건물이 주변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 도시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사람의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생각해보지 않은 다른 의견을 들었을 때, 설계하면서 놓친 것이 없는지 한번 더 되돌아보고, 나와는 다른 입장의 사용자를 배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나 살펴보게 됩니다. 안전과 관련된 이슈는 없는지, 기능에 충실하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합니다. 다수가 사용하는 공공건물일 경우는 더욱 다양한 의견을 듣고 반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협의의 과정이 긍정의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건축가가 직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것과 동시에 그런 건축가를 전문가로 인정하는 사회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학생들에게 더 좋은 학교공간을 만들고자 현상설계에 당선되어 체육관을 증축하는 설계를 진행하였을 때, 그런 협의의 과정은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설계자는 자신의 안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발주처는 건축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프로젝트의 진행 주체로 인정하는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 차례의 날선 의견조율과정은 설계안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기보다, 설계안의 유기적인 완성도를 결여한 애매한 결과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봇대집 외관, 변경전과 변경후 ⓒ 구보건축(좌), 텍스처온텍스처(우)

알고 지내는 지인 건축가가 들려준 얘기입니다. 설계를 진행하는데, 마음에 드는 설계안이 빨리 확정되고, 그 후로도 별다른 이견이나 마찰이 없어 모든 과정이 순탄한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디자인을 마무리하는게 내키지 않아 두어 달의 시간을 더 보낸 뒤에야 도서 납품을 했다고 합니다. 막상 두 달 전의 설계와 달라진 것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자신의 옆에 설계안을 두고 가끔씩 들춰보며,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에야 ‘됐다’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것이 건축설계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됐다’라는 그 느낌은 이제 우리가 만들어낸 가상의 그림들이 현실에 만들어져서 그 물리적 존재를 들어내도 된다는 싸인입니다. 그렇게 오래 갈고 닦은 건축물들이 쌓이고 모이면 정주의 감각이 살아있는 도시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는 것 자체는 도시와 거주자들에게는 변화이고 충격입니다. 그 과정이 최소한의 마찰로 적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봉제공장으로 사용하던 오래된 건물을 고쳐 카페와 사무실로 사용하는 전봇대집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폐쇄적인 건물외관을 전면유리를 설치하여 투명하게 바꾸고, 건물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배관, 전선, 환기구를 제거하여 전봇대집 고유의 단순한 비례를 드러내도록 했습니다. 건물 앞에는 폭이 좁고 긴 화단을 두어 건물과 도시가 녹색의 켜를 통해 소통하게 하고, 진입문의 높은 턱은 계단으로 잘게 나누어 들어가고 싶은 입구를 만들었습니다. 50년이 된 오래된 건물은 현황 도면이 남아있지 않아 소소한 모든 것을 실측하고, 도면/모형/스케치/3D모델링을 활용한 디자인 기간을 거쳤습니다. 공사가 이루어질 때는 현장을 매일 방문하며 체크하는 과정을 지나고 난 뒤에야 전봇대집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변화는 느리고 지루하지만, 그 결과물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전봇대집 외관, 변경전과 변경후 ⓒ 구보건축(좌), 텍스처온텍스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