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 6

  • Date2022.03.04

소비되지 않는 건축

바야흐로 소비의 시대입니다. 소비는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라는 정의는 지나치게 소박한 생각이 되어버렸습니다. 수요가 생산을 이끌었던 과거와는 달리 수요를 창출해야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한 시대가 되면서, 기업들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만든 물건을 사고 싶도록 만드는 것에 더욱 골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소비여부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대중매체나 대기업의 보이지 않는 가이드를 따라 소비욕구를 조정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필요해서 샀다고 생각하는 수 많은 물건들 중에서 실은 없어도 괜찮았던 물건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필요를 넘어서는 생산성을 과시하는 사회에서는 과도한 소비로 인한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히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놀라운 것은 소비의 행태 뿐이 아닙니다. 첨단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소비의 대상으로 삼지 못할 것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과거에는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예술, 생각, 사건도 소비의 대상이 됩니다. 체게바라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에 대항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항적인 얼굴을 프린트한 티셔츠와 각종 기념품이 상품이 되어 유통됩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반항정신’도 상품화하는 대단한 포용력입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인 6.25전쟁, 광주시민혁명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대중문화의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널리 알리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공유의 방식은 얄팍합니다. 2-3시간 동안의 재미와 감동, 지적인 만족감까지 얻게해주는 대가로 즐거이 영화비를 지불합니다. 그렇게 역사적 사건을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고 나면 그만입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현재 진행형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실시간 보도하는 대중매체나 SNS를 통한 소식 공유는 마치 게임을 감상하는 것 같습니다.  

<구글에서 체게바라 티셔츠를 검색하면 나오는 화면>
<전쟁 보도행태에 대한 기사>

소비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나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필요에 의해 (실질적인 필요, 감정적 필요) 대상을 소모하는 행위입니다. 소비의 대상은 나의 삶과 직접적인 맥락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난민들과, 과거 독립운동 투사의 삶은 나를 슬프게 하지만, 그 뿐, 나의 삶은 그와는 별개의 세계입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삶은 어렵기 때문에, 찰나의 즐거움과 감정적 해소를 가능하게 하는 소비의 행위는 더욱 각광을 받는 것 같습니다.건축은 어떨까요. 시각적인 것에 종속되기 쉬운 건축의 특성상, 우리는 건축을 이미지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사진의 발달로 건축을 이미지로 접근하기 쉬운 시대입니다. 인스타그래머블 아키텍처 instagrammable architecture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혹적이고 다듬어진 이미지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각광을 받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좋은 디자인, 좋은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현상이 건축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이미지로 읽히는 한 장의 멋진 사진을 위해, 다른 무수히 많은 중요한 요소들을 희생하여 껍데기 건축만 남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건축설계를 업으로 하는 저도 매혹적인 이미지에 반해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장소나 카페를 찾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멋있는 건축물을 잔뜩 기대하고 방문했고, 상상그대로 그 장면은 있었지만, 느꼈던 실망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실망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오랜 시간 고민이 되었습니다. 기대했던 장면은 그대로 있지만 그 이상의 건축적 경험이 부재하거나, 2차원의 사진을 그대로 3차원으로 복제해놓은 것 같은 어색함만 있습니다. 유명한 영화의 장면을 복원해 놓은 세트장을 볼 때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세트장에서 공간의 감동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리얼리티가 거세된, 가상의 세계에 불과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건축은 그래서 허망한 기운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시각, 후각, 청각의 감각들과 생활의 흔적과 기억이라는, 이미지가 담지 못하는 차원들이 존재합니다. 좋은 건축은 백화점 매장에 진열해 놓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상품으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듬고 함께하고 고민하는 건축이라고 저는 아직도 생각합니다. 건축이 참다운 빛을 발할때는 그 안에 사람들의 생활이 녹아들 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건축이 다른 예술분야와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결국 사람이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건축은 복잡하고, 어렵고, 느리고, 답답합니다.

<유명한 건축물이나 장소를 검색하면 나오는 인스타그램 화면>

소비는 사용해서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스타그램의 좋은 장소에 가서 사진을 찍고, 업로드하고, 좋아요를 누르는 그 행위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버려집니다. 그렇게 사용된 건축물을 다시 찾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한 때 인스타에서 유명했던 장소들은 그 유효기간이 길지 않아 유행의 변화에 따라 잊혀지고, 사람들은 또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납니다. 더 자극적이고 새로운 장면을 만들기 위한 우스꽝스러운 공간연출도 발달합니다. 시선을 끌기위해 이국적이거나 미니멀한 감성으로 꾸며놓은 카페, 때마침 유행하는 표식들로 가득한 인테리어의 상업공간을 보고 있으면 느껴지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멋진 장면은 좋은 건축이 자연스레 만들어내는 결과여야 하는데, 그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요소를  희생시키는 본말이 전도되었을때 다가오는 어색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건축은 우리의 오감으로 체험하는 현실의 공간에 존재합니다. 포토제닉하고 화면이 잘 받는 장면을 연출하는것은 건축을 재현하는 여러 방식 중의 하나였지만, 그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소외시켜버린 이미지의 건축은 그래서 감동을 지속시키는 힘이 부족합니다. 3차원의 공간을 평면적으로 눌러 2차원 화면에 눌러담아 원하는대로 예쁘게 보정하고 이미지로 공유되는 건축은 찰나의 호기심을 자극할 뿐입니다

저는 그래서 수동적 소비가 아닌 능동적 취향의 시대가 되길 바래봅니다. 이미지의 스펙타클로 뒤덮인 디지털 연결망 속에서 스스로의 취향을 깨달을 틈도 없이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취향을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감동을 느끼는 것이 어떤 공간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알아채기 위해서는 느슨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취향이 자라는 시간은 느리지만 단단합니다. 취향이 다양한 사회에서는 건축의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한때의 유행에 따라 소비하지 않고, 좋은 건축을 주체적으로 발견하고, 체험하고, 공유하며 만들어갈 수 있을거라 기대합니다. 좋은 건축은 능동적으로 쌓아올린 취향이 모여서, 찰나의 감각적 이미지가 아닌 긴 시간 감동의 울림이 지속가능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일과 다름아니라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협의의 과정이 긍정의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건축가가 직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것과 동시에 그런 건축가를 전문가로 인정하는 사회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학생들에게 더 좋은 학교공간을 만들고자 현상설계에 당선되어 체육관을 증축하는 설계를 진행하였을 때, 그런 협의의 과정은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설계자는 자신의 안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발주처는 건축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프로젝트의 진행 주체로 인정하는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 차례의 날선 의견조율과정은 설계안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기보다, 설계안의 유기적인 완성도를 결여한 애매한 결과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