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기록을 하는가

  • Date2020.09.25

근대적 건축설계교육의 탄생

지금처럼 매인 일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 가끔씩 혼자하는 장기배낭여행을 떠나곤 했다. 동행인 없이 혼자 여행을 하게 되면 하루가 이토록 길었나 싶을 정도로 남는 시간이 많다. 안전상의 이유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해가 지기전에 숙소로 돌아왔기 때문에 서울에서 밤의 문화를 즐기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얌전한 저녁시간이 만들어진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었던지라, 외딴 외국의 숙소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만한 거리가 별로 없었다. 독서를 하거나, 다음날 여행할 곳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생생한 오늘 하루의 일과를 꼼꼼히 기록하는 것이 나름대로 개발한 놀이였다. 하루동안 방문한 곳을 시간대별로 기록하고, 방문지에서 받았던 감상을 글로 적고, 입장료, 식대, 교통비 등 영수증을 모두 모아 수첩에 붙이면서 영수증에 쓰여있는 판매자 주소며, 사소한 정보들까지 다시 읽어보았다! 하루 동안 쓴 돈과 남은 돈을 1원 하나까지 맞추어가며 숫자를 파악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일 1-2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반복되자 그런 시간이 일종의 생활 속 의례가 되었다. 내가 하루를 어떻게 지냈는지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나의 생활을 더 정확히 인지하고, 나아가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 같은 만족감이 들었다. 내가 자신의 삶을 더 세밀히 컨트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여 하루종일 무언가에 쫓겨 바쁘게 지나가고, 지친 하루를 보내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면 겨우 세수나 하고 잠이드는, 바쁜 서울의 삶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이었다.  나에게, 도시를 기록한다는 것은 대체로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곳을 더 이해하고 싶고, 그것을 통해 그 안에 살아가는 나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 보편의 인간을 더 알아가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이다. 나는 건축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 기록의 수단은 자연스럽게 도면이다. 일반적으로 건축설계작업은 도면을 작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건물을 지어가는데, 도시기록은 그와는 반대로 이미 만들어져있는 도시를 도면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입사한 건축사사무소에서 산속 넓은 구릉지에 불교문화센터를 설계하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나는 회사에 들어간지 2년째였고 신입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려운 기술과 사고가 필요하지 않은 단순작업이었다. 넓은 대지의 경사를 등고선(대지내의 같은 레벨을 찾아 선으로 연결하여 표기하는 방식)으로 변환하는 일이었는데, 그건, 설계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기초작업에 해당한다. 소위, 베이스 도면이라고 하는, 건축가에게 주어진 대지의 자연환경을 건축설계에 적합한 밑그림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이다. 거의 3개월을 계속해서 등고선을 그리고, 지우고, 경사를 고려하여 건물의 위치와 진입레벨을 조정하는 일을 했다. 매우 지루한 작업이었다. 내가 이런 단순작업을 하기 위해 대학교육을 받고 여기에 왔는가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그렇게 길고 긴 시간, 등고선과의 싸움을 하고 난 뒤, 어느날 문득 깨달았다. 이것이 건축가가 자연환경을 인식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건축가는 디멘션(치수)을 가지고 세계를 이해하고 디멘션을 가지고 세계에 개입한다는 것을.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고,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그 때를 계기로 나는 치수라는 추상적인 툴을 무기로 가질 수 있는 건축가라는 직업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좋아졌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회없이 건축가로서 일하고 있다. 도시를 기록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넓은 구릉지를 등고선으로 치환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건축이 놓여지게 되는 대지 상황을 건축가의 언어로 변환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건축설계를 시작할때, 가장 먼저하는 것이, 땅의 현재와 과거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예술가적인 상상력과 좋은 감각을 이용하여 한 순간 탄생한 건축적 아이디어가 좋은 건물로 이어진다고 믿지 않는다. 현황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끊임없이 검토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물이 오래도록 좋고, 다수에게 좋다고 믿는다. 설계는 -등고선을 그리고, 지우고, 고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매우 지루한 작업이며, 서류와의 싸움이고, 꾸준함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다. 지금 하는 일의 끝이 있을까, 하는 진이 빠지는 과정을 계속 묵묵히 감당하다보면, 어느새 무언가가 만들어져 있었다. 관련된 사람들(건축주, 시공자, 민원인, 관계구청, 심지어 함께 일하는 파트너, 직원)과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고, 그런 외부요인들은 디자이너인 건축가가 원치않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끌고가기도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다시 되돌아온다. 이런 시간을 겪으면서 서서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건물을 만드는 과정이고, 도시를 만드는 시간이다. 그런 지난한 과정의 처음과 끝을 함께하는 도구는 ‘도면’이다.

도면의 속성 건축가는 도면으로 소통하고, 도면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도면으로 최종 결과물을 완성한다. 도면이 다른 표현수단들과 구분되는 점은 실제에 기반한 ‘치수’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치수를 가진다’는 속성은 도면이 어느 한 순간도 리얼리티를 떠날 수 없다는 뜻의 다름 아니다. 유학생때의 일이다. 밥을 먹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심지어 잠들기 직전까지 설계과제에 대한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런 머릿속의 상상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고, 멋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흥분되었지만, 막상 그 아이디어를 도면으로 그리고 나면 실현되지 않아 실망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실제 치수에 맞게 그려보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공부였고, 그런 훈련을 거듭하면서 실제 치수에 대한 감각이 계속해서 좋아지고 건축가로서의 역량이 늘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지만 발목을 잡는 리얼리티의 추구 때문에 어렵고, 무겁고, 느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현실에 발 붙여야 하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도면이기에 가지게 되는 고유의 미학이 있다. 사실을 추구하는 직접성과 간결함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도면은 건축가의 사상과 생각, 꿈을 드러내지만, 철저한 사실성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그곳에는 개인의 해석과 감상이 없어서, 더욱 극명하게 도시의 진실을 전달한다. 도면은 그 안에 기계성을 내포하고 있어 아름답다. 건조하고 사실적인 것의 추구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그림1-전봇대집 실측평면>

<그림1-전봇대집 실측평면>

대치동 실측조사: 은마상가를 중심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매년 진행하는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의 2017년도 지역은 대치동이었다.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에서 전체적인 사회사를 다루고, 우리팀은 건축공간실측을 담당하였다. 재건축과 부동산의 열기가 뜨거운 강남의 대치동은 철저하게 학원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입시전형의 일정에 맞추어 도시의 다른 영역들이 맞춰 돌아가는 거대한 교육과 부동산의 도시였다. 실측팀인 우리는 은마아파트, 은마상가, 학원가, 그리고 구마을 이렇게 네개의 테마로 방향과 조사지역을 설정하여 움직였다. 이 중에, 가장 흥미로운 실측의 결과물은 은마상가라고 생각되는데, 지하 아래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를 기록하는 방식으로서 도면이라는 툴을 선택한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복작복작한 재래시장의 느낌을 전달해주는 사진이나 동영상, 스케치는 우리가 평소에 자주 접해왔던 수단으로서 그 효과가 예측가능한 것에 비해, 도면은 일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나의 세계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상황과는 달리,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조물주의 관점으로 세상을 그려낸다. 따라서 전체를 파악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도면은, 지하세계를 이해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기법의 방식으로는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을 그리는 ‘평면도’, 앞에서 바라본 모습을 그리는 ‘입면도’ 혹은 ‘단면도’가 있는데, 은마상가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이 세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하였다. 지하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화려한 재래시장의 세계가 펼쳐지는 놀라움을 다양한 업종의 작은 가게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그림2-은마상가>

이외에도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그림은, 은마아파트의 배치도이다.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꽤 높게 자라 울창한 나무가 아파트 사이사이 훌륭한 녹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아파트, 그것도 강남에 있는 아파트 단지는 인공적인 건물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반면, 1970년대에 만들어진 은마아파트는 이미 40년이 넘는 시간의 켜가 쌓이는 동안 자연스럽게 자연도 함께 성장한 곳이 되었다는 자각이었다. 이를 도면에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아파트 외부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공간구조가 모두 한눈에 보이는 도면을 선택하였다. 이로써, 아파트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40년의 켜를 가지고 땅과의 관계를 단단히 하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표현되길 원했다. <그럼3-은마아파트 배치도>

<그럼3-은마아파트 배치도>

구룡마을 실측조사: 최소주거 공동체마을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서울소셜스탠다드와 함께 구룡마을 실측조사를 시작하였다. 구룡마을은 서울에 남은 마지막 무허가 주거마을로서 재개발 사업시행이 결정되어 마을이 사라지기 전, 그 모습을 담아두려는 취지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서울대 지리학과 연구팀에서 전체적인 조사를 맡았고, 마을의 모습을 건축적인 방식으로 분석하고 기록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처음으로 구룡마을에 방문했을 때 느꼈던 인상은 도시의 내부 창자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있는 벌거벗은 도시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속살을 보는 듯한 충격이 있었다. 21세기의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하는 감상적인 생각을 접어두고 우리 실측팀은 최대한 건축적인 부분에 집중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자 하였다. ‘최소주거’는 그런 구룡마을에서 찾아낸 건축적 주제였다. 사람이 살기위해 필요한 최소의 설비, 최소의 면적, 최소의 구축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공식적으로 허가받지 않고 점유한 곳이므로 전기, 수도, 가스등의 기반시설이 국가로부터 공급되지 않을 때,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일반적인 경우, 지하로 매입되어 공급되는 설비들이 모두 노출되어 공급되는 모습이 자아내는 경관을 어떻게 도면으로 표현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한 각 세대의 실내공간을 여유있게 확보하지 못하기에, 길로 사용되는 외부공간을 사적으로 변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작은 텃밭, 화분을 가꾸거나 부족한 창고공간으로 활용하는 경우는 일반적이었고, 심지어 냉장고나 세탁기등을 길가에 내놓고 사용하는 경우도 보았다. 공간의 변용뿐 아니라, 구축요소의 다양한 활용도 눈에 띄었다. 어딘가에서 철거하고 남은 실내용 나무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거나, 타이어나 벽돌등을 지붕재가 큰 비바람에 날라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무게추로 사용하기도 했다. 제품으로 나와있는 단열재 대신, 에어캡, 공기층이 있는 박스, 비닐등을 여러겹 덧대기도 했다. 이처럼 최소한의 거주조건을 유지하는 곳에서, 예상밖으로 커뮤니티 공간은 비교적 풍요로웠다. 여러 채의 교회시설이 있었고, 자치조직을 위한 공간, 골목길의 평상들, 대규모 마을모임을 위한 공터 등이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것은 물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이 두 가지의 우선순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최소한의 물리적 요소들을 최대한 사실에 근거하여 도면으로 기록하되, 풍성한 나무나 사람의 움직임을 도면에 포함하여 사회적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구룡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그림4-구룡마을>

현대인은 대부분 도시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경험하는 도시는 너무 일상적이고, 거대하고, 복잡해서, 그 모습을 전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많지 않다. 내가 아침, 저녁으로 마주하는 곳의 모습을 도면을 통해서 바라보는 경험은 그래서 신선하고, 흥미롭다. 실측조사를 하기 전과 후의 대치동은 나에게 같은 의미를 가진 곳이 아닌것 처럼. 또한 우리의 도시는 대체적으로 잘 관리되고 있어, 그 이면의 날것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구룡마을처럼 어떻게 보면 특수한 환경을 가진 마을의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그 특수함에서 오히려 일반성을 깨달아 지금 내가 살아가는 도시의 특성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한다. 건축가에게 도시는 무한한 상상이 펼쳐지는 무대이다.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의 관계맺음에 따라 예측불가능한 만남이 펼쳐지는 곳. 그 세계에서 하나의 점 같은 요소를 더하고, 변형하는 경험을 즐기는 사람이 건축가이다. 그러한 건축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도시를 나름의 방식으로 -도면화하는 과정을 통해- 관찰하고, 기록하고, 공부하는 일은 건축일을 계속하는 한, 멈춤없이 시도해야 할 일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