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지키는 일
- Date2023.12.27
친구들끼리 ‘빡빡산’이라고 부르던 돌 무더기 동산이 있었다. ‘빡빡산’은 우리에게 롯데월드이자 에버랜드였다. 거대한 바위 덩어리 몇 개를 두고 하루 온종일 갖가지 어드벤처를 즐기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택지를 정리하며 발견된 암반들의 일부가, 헐벗어진 능선 위에 버려진 것이 ‘빡빡산’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 대학원에서 도시와 건축을 공부하면서였다.
동네에는 어머니의 교회 집사님이 운영하시던 오락실, 같은 반 친구네 슈퍼마켓, 전교 학생회장네 인테리어 가게 등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었다. 꼬마 시절의 동네는 하나의 연속된 공간이었다. 고기 구워먹는 이웃집의 소란스러움, 골목에서 공을 차는 친구들이 뛰는 소리, 마당에 모여 앉아 수다떠시는 동네 아주머님들이 동시에 한 장소에서 모두 함께 감각되는 연결된 경험이었다.
아이들이 경험하는 공간의 스케일은 성인의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게다가 스마트폰과 같이 거리를 압축하고 속도를 가속하는 디바이스가 없던 시절의 공간 경험은 보다 육체적이었고, 한정적인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걸어서 5분이 채 안 걸리는 학교와 집의 사이가 우리들 세상의 중심이었고, 그 너머를 탐색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어른이 되어 웹의 지도를 통해 세상을 전지적 시점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그 세상이 얼마나 우습게 작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 느린 속도로 작은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던 꼬마들의 도시 경험은 농축된 감식초마냥 진득하고 농밀한 것이었다. 전봇대 하나하나의 다른 생김새, 골목 담장의 시멘트 벽돌 모양, 바닥의 멘홀뚜껑 위치 따위의 것이 온몸으로 기억되어, 그 안에서 우리는 그 ‘우습게 작은’ 동네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광활한 우주인 것 마냥 강렬하게 학습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 곳에 ‘뉴타운’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최근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자연스레 친구들과 왕래가 잦아들면서 우리들만의 우주는 그곳에 박제시키고, 우리는 대학과 사회의 꿈을 꾸기에 적당한 곳으로 각자 제 갈 길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어린 시절 세계는 세상의 스릴넘치는 변화에서 비켜서서 어딘가에 격리되어 있을 것만 같았는데, ‘뉴타운’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가 그 위에 간판을 세웠다.
‘뉴타운’이 되기전 우리가 ‘박제시켰던 우주’의 마지막을 만나러 찾아갔다. 이미 오래전 기억 속의 건물들은 깨끗하게 지워지고, 수십개의 거대한 크레인만이 마을을 습격한 거인처럼 우뚝 솟아있었다. 우리가 자동차들과 뒤섞여 공을 차고, 숨바꼭질하던 골목길은 좌회전, 유턴, 자전거 통행로 등이 안전하게 분리된 광폭의 8차선 도로로 바뀌어 버렸다. 아무리 보아도 그 8차선 도로는 ‘오징어 게임’을 하기에 적합한 공간이 아닌 것 만은 분명해보였다.
자본주의는 흉폭하다. 사회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가 끝없이 순환하며 증폭되어야만 한다. 잠깐이라도 지체되거나 순환의 동맥경화라도 일어난다면 경기침체의 공포를 겪어야만한다. 건설업이 국내총생산(GDP)의 15.4%나 차지하는 대한민국에서 아파트 단지로 대표되는 건설은 자본주의의 핵심기제 중 하나다. 사회의 원활한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파트 단지를 짓고 부수는 일을 반복할 수 밖에 없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PF 위기로 인한 부동산과 신용위기는 이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이벤트 정도로 취급된다.
‘오랜 시간 도시가 쌓은 집단의 기억(memory)’을 건축의 언어로 활용하고 새로운 형태는 도시의 기억을 끄집어 내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저 먼나라의 건축가 알도 로시(Aldo Rossi)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가 도시를 대하는 태도에는 절망적인 부분이 있다. 자산의 증대를 위해 도시의 기억을 삭제하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를 세우는 일에 목을 메는 모두의 재테크가 ‘선(善)’으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은 되돌아볼 가치가 있다. 우리의 박제시켰던 우주는 이제 말끔하게 지워져버렸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새겨질 우주를 지켜주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 선(善)’ 중에 하나 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